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 5번째 날이 밝았다. 전날밤에 들은 바에 따르면 이 호텔에는 아침식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아침식사 장소는 로비. 로비가 그리 넓지 않아서 여기서 어떻게 식사를 할까...? 의문스러웠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아침을 먹으러 로비에 내려갔더니 한쪽 편에 테이블이 여남은 개 차려져 있고, 이미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Toyoko Inn의 서비스는 여기서도 남달라서, 아침식사는 오니기리 - 전통 일본식 삼각주먹밥이었다! 한쪽 편에 몇몇 종류의 오니기리가 만들어져 있고, 츠케모노와 장국을 떠다먹는 방식이었다. 오, 나는 살짝 감동했는데 신군은 조금 불만이었던 모양이다. 나름 종류도 여러가지였고 맛도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사먹기는 좀 아까운 메뉴 아닌가, 오니기리란. 그리고 작은 로비에서 드나드는 사람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바로 옆 테이블에 앉은 아주머니는 핸드백에서 작은 헝겊 주머니 -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잘한 무늬가 들어가고 끈으로 조이는 그런 주머니 - 를 꺼내더니, 거기서 다시 네모난 플라스틱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 들어있던 나무 막대를 돌려서 조립하니 헉, 나무 젓가락이 되었다. 말로만 듣던 휴대용 나무 젓가락을 여기서 처음 보았다. 신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진도 찍었는데, 사진만으로는 너무 멀쩡한 젓가락이라서 생략한다. 또 다른 테이블에는 조금 나이 들어 보이는 간바레상(3일차 여행기 참조) 부부가 있었는데 다시 보니 바이크족 같기도 했다. 신군은 이들의 여행 시나리오를 장황하게 쓰기 시작했다 (폭주족 시절에 만나 일찍 결혼하여 열심히 일하며 살다가 자녀들이 독립하자마자 다시 옛 생각을 하며 바이크 여행을 떠난..... 등등)
오니기리 사이즈는 절대 작지 않아서, 저 하나가 밥 한공기일 거라고 짐작되었지만.. 나도 종류별로 네다섯개, 신군은 그보다 많이 먹었다. 완전 배가 빵빵해졌지만 쿠시로의 명물 해산물 시장에 가보자고 아침산책을 나섰다.
쿠시로는 항구 도시였다. 나름 홋카이도 도동 지역에서는 가장 큰 도시인데, 간밤에 숙소 찾느라 지친데다 습원 탐방(!) 계획만 짜느라고 쿠시로 시내에 뭐가 있는지 제대로 봐두지 않았다. 사실 시간도 그리 많지 않았고. 큰길을 따라 조금 걸어내려가다보니 금방 배가 보인다.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MOO인가 하는 나름 유명한 쇼핑몰이던데, 시간도 이르거니와 별로 관심 없어서 그냥 지나쳤다.
다리위에 여인상이 4개 -춘하추동이래나- 있는데 그 중 한 여인의 머리에 갈매기가 버티고 앉아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건너 갈 때 날아와 앉은 놈인데 돌아올 때도 그 자세로 앉아있길래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보니 이 다리가 유명한 다리더라. 유명하다는 기준은, 음. 관광안내책자 여러 개에 나와있다는 것?
날이 좀 꾸리꾸리하다..밝고 보니 이 주위엔 왜 이렇게 호텔들이 많은 것인가?
그냥 다리를 건너갔다가 별 볼일 없길래 되돌아왔다. 길을 잃을까봐 큰 길만 따라서. 어시장은 어제 위치를 확인했지만 쿠시로역 근처에 있다.
큰 길의 도로안내판 뒷편이다. 보기 싫을 수 있는 뒷면에 관광자원인 두루미 등의 사진을 넣어놓은 것이 눈에 띄었다. 앞편엔 당연히 이리로 가면 어디, 라고 씌여있고.
역 근처 공원의 증기기관차.
여기가 어시장이다. 이름하여 쿠시로 단정(丹頂)시장. 큭. 여기도 두루미 날아가고. 쿠시로 명물인 저 두루미가 단정학이란다. 다른 시장도 있지만 우리는 이쪽을 택했다. 하여간 남들이 가는데는 꼭 피해가는 이상한 커플이다.
과연 덮밥을 팔고 있었다. 아바시리의 어시장보다는 당연히 한결 크고 정돈된 느낌. 비교하자면.. 쿠시로가 노량진 어시장이라면 아바시리는 철길이 남아있던 시절의 소래포구 같달까. 우리는 어느쪽이냐면.. 아바시리쪽이 좋았다. 일단 싸기도 하고. 어쨌든, 이 '내맘대로' 덮밥 勝手丼을 주문하면 일단 스티로폼 그릇에 하얀 쌀밥을 담고, 그 위에다가 원하는 대로 진열되어 있는 덮밥 재료를 선택해서 얹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아까 오니기리를 많이 먹은 탓에 아직 배도 부르고.. 진열대를 들여다 보니 준비된 재료에 붙어있는 가격표가 양에 비해 넘 비쌌다. '헉, 연어알 조만큼에 300엔이야?' 그래서 그냥 다른 가족이 주문해 먹는 것을 구경하고 돌아왔다. 다음에 다시 홋카이도에 가면 갓테동은 아바시리에서 먹을테다.
부지런히 호텔로 돌아와 체크아웃을 했다. 간밤에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짠 결과, 9시 5분발 열차를 타고 とうろ에 가서 습원 관찰을 한 뒤, 12시 5분 쿠시로행 습원열차로 쿠시로에 다시 돌아와 오후 1시 25분 기차로 오타루에 가기로 했다. 빡빡하다. 짐은 일단 호텔에 맡겨두고 쿠시로역으로 향했다.
간밤에 마쯔다양과 한참을 헤맸던 쿠시로역 앞. 생뚱맞게 이쁜 교회가 하나 있고 저 뒤쪽으로 마쯔다 렌터카 사무실이 있다.
플래폼에는 우리가 탈 쾌속 열차가 예쁘게 서 있었다. 열차는 비록 한 량짜리지만, 엊그제 우리가 떠나온 아바시리까지 3시간에 가는 쾌속열차.
토우로(塘路)역 도착.
토로역 부근에는 뭔가 다양한 액티비티가 준비되어 있는 듯 했으나, 우리는 짧은 시간 동안 습원을 가까이서 볼 생각에 자전거를 빌리기로 했다. 아, 사실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역 안에서 자전거를 빌려주는 것을 보고 나와서 안내판을 보다가 자전거를 빌릴까? 한 것이다. 자전거 대여는 2시간에 1인당 1,200엔이었다. 좀 비싼 듯 했지만 자전거도 새거고; 배낭에 잠금장치와 함께 생수 한 병과 쌍안경도 챙겨주신 데다가, 페달에 바지 걸리지 말라고 발목에 테이핑도 해주셨다.
조금 더 큰 안내도도 있고 아이스크림 가게도 있다. 비-루 아이스크림의 설움(4일차 여행기 참조)을 상기해주기 위해 저 소프트콘 간판을 찍은 사진도 있지만 초-챙피해졌으므로 생략한다.
나란히 서 있는 자전거 두 대. 대여소에서 챙겨주신 생수도 꽂아놓고.
첫번째(?) 목적지는 곳타로 전망대였다. 지도상 약 7km. 포장도로를 얼마간 달린 다음 곳타로 전망대라는 표지판을 따라 갈림길에 접어드니, 헉! 비포장(혹은 반포장) 도로가 나온다. 차라면 별 문제 없을 정도로 다져진 길이었지만 자전거로서는..'으..ㄷㄷㄷㄷㄷㄷ' 소리가 절로 나왔다. 저 길을 신군은 '서냐서냐-'를 외치며 잘도 달려갔다.
저만치 앞서가는 신군
달리다보니 대체 우리가 왜 7km를 자전거로, 그것도 단 2시간에 왕복해올 생각을 했을까 싶었다. 지나가던 차들이 '간바레'를 외치며 지나갔다. 아- 그렇게 힘든 코스인 건가. 일단 페달을 밟았으니 중간에 포기할 수는 없고! 곳타로 전망대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초조함에 가는 길에는 정신없이 달렸다. 물론 아직 기력도 잔뜩 충전되어 있는 상태였고.(오니기리 오래간다) 그리고 풋풋한 식물 냄새와 지나가는 바람에 기분은 좋았다.
드디어 도착한 コッタロ 전망대. 꼭 화장실 건물 같이 생겼는가? 화장실이다. 저 뒤에 얼핏 보이는 계단이 전망대로 향하는 길.
아.. 계단 제대로다.. 7km를 페달을 밟아왔는데 계단쯤에 무너질수야.
전망대 중간에 보이는 습원 풍경. 몸을 던지면 폭신-할 것 같다.
드디어 전망대 도착.
전망대라고 해도 이제는 짐작할 수 있듯이 탄탄한 나무 난간이 있을 뿐 아무것도 없지만,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습원 풍경은, 오- 근사했다. 구름이 낮게 깔려서 더 제대로인 것 같다. 두루미를 비롯해서 야생동물들이 많다고 하는데 - 그래서 자전거 대여소에서 쌍안경을 채비해 주었다 - 숲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나무인지 동물인지 잘 모르겠었드랬다.
돌아오는 길은 한층 더 스펙터클했다. 전망대에 관광(?)버스 한 대가 도착한 듯 관광안내원과 함께 한 무리가 올라오길래 거슬러 내려왔다. 역시나 중형버스가 화장실ㅋ 앞에 서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이번에는 조금 천천히, 그리고 중간중간 쉬어가며 돌아왔다. 사실 기운도 빠지고 배도 좀 고팠다.
흐르는 강물을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도 있다. 저 강을 따라 래프팅도 하는 모양이었다.
습원 건너로 어제 올랐던 전망대가 보였다. 손가락 부분이 내가 영역표시한 곳;
돌아오는 길은 꽤 멀었다. 한참 가고 있는데 수상한 차가 한 대 보였다. 길가 도랑에 한 바퀴가 빠진 듯, 공사중 안내판을 들어다가 어떻게 빠져나오려는 모양이었다. 그냥 지나치긴 뭐해서 신군과 둘이 지켜보고 있는 동안 차가 발라당, 까진 아니고 히딱- 옆으로 완전히 누워버렸다. 한 쪽이 완전히 빠져버린거다. 누가봐도 견인차가 필요한 상황. 어떻게 도와주고 싶지만 우리는 여행자 신분. 휴대전화도 없고. 동승했던 여인이 우리를 보고 간절한 눈빛을 보내길래, '저 뒤에 버스가 오고 있다'고만 알려줬다. 과연, 곧이어 다다른 아까의 그 중형버스 기사님이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것을 보고 우리는 자리를 떴다. 아무것도 없는 습원 한가운데 길에 차가 홀라당 빠졌으니 얼마나 황당+난처했을까. 아니, 그보다 애초에 왜 빠졌냐고! 지나가는 차도 없는데. 사진을 찍을까 했지만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웃음거리로 만들어선 안된다는 신군의 말에 따라 그냥 돌아왔다.
이래저래 여차저차 지체하긴 했지만 열심히 달려준 끝에 - 일단 내가 자전거도 신군에게 뒤진다면 서럽거든 - 열차 시간이 되기 전에 돌아와서 두번째 목적지였던 (그런게 있었는지도 잊어먹을 정도로 지쳐있었지만) 호수로 향했다. 대략 15km는 족히 - 그 중 대부분은 비포장 - 달려주신 덕분이 다리는 후들후들 거리고 땀에 젖었지만 그래도 호수는 예뻤다. 바람이 좀 덜 불면 보트를 타도 좋았을텐데.
다음에는 곳타로 전망대엔 꼭 차로 가자고 다짐하며 기차역으로 향했다.
쿠시로로 돌아올 때에는 노롯코열차라고 이름붙여있는 관광열차를 탔다. 이 열차는 그야말로 관광용으로 차창부터가 확- 열려있고 좌석도 아예 창을 향해 배치되어있다. (아, 사진에서 말고 반대쪽) 열차 사이에 매점도 있고, 천천히 운행하면서 안내방송까지 해준다. 중간중간에 동물 인형들도 붙여놓고 했는데 흔들려서 잘 안보인다. 사람도 많고 시간도 촉박해서 허둥지둥 타느라고 차량 외부 사진 찍는걸 깜빡했다
습원열차 내부
이렇게 슾지를 가까이 지나간다.
목도 마르고 배도 고파서 신군더러 과자를 사다달라고 했다. 땅콩을 사왔다. 이봐라 신군아, 땀흘려서 염분보충해야 한다. 짠맛나는 과자를 사와랏- 다시 보냈다. 아니, 왜 짭쪼름한 센배도 많은데 하필 프링글스를 사오는 것이냐. 하지만 열차 달리는데 과자사러 매점 왔다갔다한게 미안해져서 잔말않고 그냥 먹었다.
숲 사이로 동물이 지나가면 경적을 울리며 안내를 해준다. 그러면 사람들이 우르르 그 쪽 창가로 몰려가 '어디어디?'하는 분위기다. 습원 사이에 인공물이 그다지 많지 않은데, 수문이 있다. 똑같이 생긴 탑이 두 개.
요것도 열차에서 꼭 설명해주는 것 중 하나라서 다들 사진을 찍는다.
조금 땡겨서 또 찍어봤다.
열차는 중간에 호소카와 역을 지나는데, 갈 때도 올 때도 여기에 내려볼까 망설이다가 그냥 지나쳐왔다. (지도상으로는) 이 역에 내리면 습원을 좀더 가까이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 오타루까지 가야했기 때문에 아쉬움을 남기고 쿠시로역으로 직행. 쿠시로 역으로 향하면서 전략을 짰다. 일단 신군은 호텔에 가서 짐을 찾아오고, 그동안 나는 기차 티켓을 사고, 은행에 가서 환전을 하기로 했다. 현금이 거진 떨어졌기 때문에 가지고 있던 200 달러를 엔화로 환전할 생각이었다. 기차티켓을 받는데는 문제가 없었다. 패스를 보여주고 계획했던대로 1시 25분 오타루행 티켓을 받아쥔 다음, 큰길을 따라 내려오며 제일 먼저 보이는 은행에 들어가 환전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은행원이 자기네는 환전을 안한다면서 길을 건너 똑바로 내려가라면서 은행 이름도 적어줬다. 다음 은행에 가는 길에 신군을 만났다. 마침 만난 근처에 북해도 은행이 있었다. 들어가 물어보니 환전 된다고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랜다. 이 때 시간이 12시 40분쯤이었을라나. 10분쯤 기다리다가 신군은 먼저 역에가서 에끼벤을 사서 기다리기로 했다. 나는 1시가 넘을때까지 차례가 안 오면 그냥 역으로 갈 생각이었다.
1시를 몇 분 남겨놓고 차례가 왔다. 됐다!고 생각했다. 설마 환전하는데 10분이 걸리겠어 20분이 걸리겠어. 라고 생각한 거였다. 창구원이 전표를 쓰라고 하더니 잠깐 기다리랜다. '1시 25분 기차니까 조금 서둘러주세요'라고 했더니 알았으니 기다리랜다. 10분이 지나도 15분이 지나도 말이 없다. 그냥 달러라도 돌려받고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창구로 갔더니 조금만 기다리라면서 다른 사람을 부른다. 진짜 열받은 건 이때부터다. 창구 뒤쪽에서 누가 나와서 얘기를 듣더니, 창구 앞에 걸어놓은 오늘의 환율을 확인하는거다. 오마이갓- 십오분동안 아무것도 안했단 얘기가 아닌가. 그리고 뭔가 서류와 돈이 오가더니 드디어 나에게 엔화가 들어있는 봉투를 건네 준 것이 1시 23분. 7분이면 갈 수 있을까, 달려가면 5분이면 갈 수 있을지도 몰라... 하면서 시간 계산을 하고 있던 나는 이미 똥줄이 타다못에 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もう、晩い!' 한 마디를 남긴 채 금액 확인도 하지 않고 달려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왕 늦은거 'YOU RUINED MY HONEYMOON!'하고 소리라도 질러줄걸 그랬다.
아침부터 몇번을 왔다갔다했던 그 큰길을 따라 기차역으로 달려가는데 막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엉엉- 울음이 나왔다. 어차피 아는 사람도 없으니 소리내서 울면서 뛰었다. 신군은 플랫폼도 아니고 기차역 로비에서 신문을 보고 서 있었다. 나중에 나는 '엉엉-' 울면서 뛰어 들어갔다고 하고, 신군은 '꺽-꺽-' 울면서 뛰어들어오더라고 했다. 꺼이꺼이-라면 모를까, 꺽꺽-은 뭐냐. 여하간, 내 얼굴을 보고 비상등이 들어온 신군, 바로 5분 후에 출발하는 완행열차표를 끊어가지고 나왔다. 우리가 알아본 바로는 오타루행 다음 열차는 2시간인가 3시간이나 뒤인데, 내 상태가 몇 시간씩 내버려 둘 수 없을 것 같았던지 오비히로까지 가는 완행열차표를 끊어나온거다. - 하긴, 물론 시간이 있었으면 북해도 은행가서 점장 나오라고 뒤집어 엎었을 거다. 200불 환전하는데 30분이 넘게 걸리다니, 미쳤지. - 당시에는 설명을 들을 여유는 없었는데, 신군 말로는 그 다음에 오는 오타루행 열차는 좌석이 없었단다. 물론 자유석에서도 시발역이니까 앉아갈 수 있었겠지만. 그땐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조금 웃긴 일은, 그 상황에서도 나는 에끼벤을 산 비닐봉투가 없는 것을 놓치지 않고 에끼벤 샀냐고 물어봤다는 것이다. 신군 왈, 아무래도 시간에 못 올 것 같아서 안 샀댄다. 이런! 하지만 그 때는 이미 시간도 없었고. 화도 안내고 나를 달래고 있는 신군 - 사실 그 마음이 느껴져서 더 슬펐다. -한테 도시락 안 사왔다고 뭐랄 수도 없지 않은가. 여하간 기차 안에서도 끅끅 거리고 울고 있는데 바다가 보였다. 태평양이다.
홋카이도에서는 세 개의 바다를 만났다. 일단 시레토코 반도를 넘어서 보았던 오오츠크해. 그리고 남쪽의 태평양. 그리고 오타루에서는 동해를 보았다. 동해가 서쪽에 있다는건 참 신기한 기분이었지만, 그리고 우리가 아는 동해보다 꽤나 북쪽의 바다지만 여하간 동해는 동해다.
쿠시로에서 시라누카역까지는 기찻길이 해변을 따라 나란히 달린다. 완행열차인지라 속도도 빠르지 않은 터라 해변에서 노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8월이라고는 해도 홋카이도의 바다는 왠지 추울 것 같았다. 그냥 느낌이.
저 바다를 보며 까무룩 잠이 들었다. (원래 울고 나면 잠이 잘 오지 않나? ㅎ) 별로 오래 잔 것 같진 않았는데 얼핏 일어나보니 신군이 없다. 미아(?)가 된 줄 알았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니 기차는 あすない역에 정차해있고 신군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잠깐 정차한 사이에 나가서 에끼벤을 사온 것이다.
사실 쿠시로에서 굳이 에끼벤을 사오라고 한 것은 쿠시로 역의 에끼벤이 유명했기 때문이지만, 아쓰나이 역의 에끼벤도 충분히 훌륭했다. 연어구이가 얹어진 밥에 비엔나 쏘세지와 토마토 소스 스파게티가 반찬으로는 안 어울린다 싶었지만. 이미 배도 고팠기 때문에 (원래 울다가 잠들었다 깨면 배가 고프지 않나? ㅎ) 고맙게 얌냠 먹었다. 먹고나니 이제야 열차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나중에 신군은 이번 여행에서 이 열차 구간이 가장 좋았다고 했다. 위로의 말인지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차를 놓친 사람 입장에서 대놓고 좋았다고 할 순 없지만 사실 나도 좋았다. 여행이란 역시 이렇게 느긋하게 마구마구 시간을 써가며 (돈이 아니라 시간을!) 다니는 것이 제일인 것 같다.
이쁘다 신군.
이 완행열차는 거의 역마다 서서 몇분씩 쉬었다 가는 진짜 시골 기차였다. 오비히로까지 무려 5시간이 걸리는. 쿠시로에서 삿포로까지 가장 빠른 기차가 3시간 35분 걸리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느린 것이다. 사람도 몇 명 없고. 하긴 삿포로나 다른 곳으로 가는 여행객들은 우리가 처음 계획했던 것처럼 수퍼 오조라 호를 탔을 터였다. 수퍼 오조라 호를 타면 오비히로까지 1시간 반이면 간다. - 신군은 우라호로 역에서 담배 피운다며 혼자 플랫폼으로 내려갔다가 역무원한테 금연구역에서 담배피운다고 걸려서 도망쳐 들어왔다. 고등학생도 아니고. 이케다 역에서는 여고생들이 한무리 올라탔다. 아마 기차를 타고 통학하는 듯. 신군은 '子ギャール다'며 황홀해했다. 본인은 아니라고 해도 황홀해했다. 발을 벗고 앞 좌석에 얹어놓고 있던 사람이 구두까지 신고 똑바로 앉았다. 복도를 마주보고 옆 좌석에 앉아있던 여고생들이 자기네들끼리 떠드는 소리(대강 이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중국인? 아냐 한국인. 봐바- 지도에 한자 아니쟎아' ) 를 듣고 끼어들었다. "韓国人です。"
후배들의 깍듯한 인사를 받는 걸로 보아 고학년인듯, 게다가 눈에 띄는 화려한(?) 외모. 짱인가보다. 싶은 언니들이었는데. 아.. 반응이 그렇게 폭발적일 줄은 몰랐다. '꺄아-꺄아-' '안녕하세요(한국어로)', '일본어 할 줄 알아요? 우와-', 'ラブラブですか?新婚旅行?’ 아.. 왠지 라브라브 모드를 보여줘야 할 것 같았지만.. 별로 뜨거운 신혼이 아니라서 미안했다. 어쨌든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갸르들이 내려 손을 마구 흔들어주고 집에 간 뒤에도 한참을 더 가서 드디어 지겹다고 느껴질 때쯤 오비히로가 나타났다. 오비히로에 도착한 시간은 17시 06분.
중간에 정차했던 어느 역에서. 요런 쪼꼬만 집하나에 살면 -저 앞에 나무에 크리스마스 장식하고 - 좋겠다고 처음으로 신혼여행다운 생각을 했다.
오비히로 역에서는 한 30분정도 시간이 있었다. 쿠시로역에서 4시 17분에 출발하는 다음 열차가 오비히로에 들어오는 시간이 17시 46분. 그러니까 우리는 쿠시로역에서 보낼 시간을 기차 안에서 보냈다고 보면 되는 거였다. 다만, 쿠시로에서도 지정좌석이 없었던 만큼 여기서도 좌석이 없기는 마찬가지. 자유석에서 자리를 찾아야 하는 것이었다. 삿포로 도착시간은 대략 8시. 그러면 바로 오타루행 열차로 갈아타야 할테니 기차안에서 저녁을 먹어야 할 생각이었다. 역시 에끼벤으로, 왠지 오비히로 명산물 같은 부타동(돼지고기덮밥)을 샀다. 무려 950엔. 비싸서 하나만 샀다. 그리고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삿포로 맥주는 아니지만) 황금색 YEBISU 두 캔과 치즈케잌이며 롤케키 같은 것들을 샀다. 어디 다니면서 단 군것질거리들을 사는 건 내 취미인데, 주로 선물용이다. 기념품 이런거 필요 없다. 항상 맛난게 제일이다. 하하- 그래서 일본에서는 선물사기가 편해 좋다. 홋카이도에서는 가는 데마다 이 동네 특산물이라고 시로이코이비토(白い恋人)를 파는데, 사실 조금 비싸서 선뜻 사게 안 되었다. (오비히로에서는 못 샀지만 결국 나중에 면세점에서 잔뜩 샀던가.)
기차에 올랐더니 사람들이 가득, 다행히 나는 기타를 올려놓고 자고 있던 총각을 깨워 그 자리에 앉았다. 음하하핫- 대한민국 아줌마가 된 것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신군한테 한시간 뒤에 교대하자고 했더니 기차칸 사이 문간에 자리를 잡았다고 걱정말랜다. 얼핏 보니 신문지를 깔고 주저앉아 가는 것 같았다. 창가자리도 아니지만 이미 날도 어두워져서 창 밖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혼자서 에비슈 한캔을 마시면서 딕플에 들어있던 동영상을 보다 잠들었다. 자다 깨서 신군한테 가서 아까 샀던 도시락을 먹자고 했더니, 벌써벌써 아까아까 다 먹었댄다. 세상에, 나 혼자 좌석에 앉아간다고 밥을 혼자 먹다니!
담겨 있던 드라마는 アネゴ。
삿포로에 도착한 것은 오후 8시 10분. 바로 이어지는 오타루행 열차 플랫폼으로 갔다.
우리를 오타루로 데려가 줄 빨간 열차
오타루에 도착한 것은 9시 10분. 숙소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온 터라 일단 호텔부터 찾았다. 역 앞의 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니 그린호텔이 보였다. 너무 비싸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하며 들어갔는데, 다행히 과하지 않은 가격에 별관에 방이 있댄다. 그런데 카드는 되지 않았다. 역시 그 난리를 피웠어도 쿠시로에서 환전해오길 정말 다행이었다. 체크인을 하고 산책을 나왔다. 호텔 앞에서 타코야끼를 팔고 있길래 사들고 운하쪽으로 내려갔다.
어두운 강물(?)에 비치는 야경이라니. 가까이로 내려가 벤치에 앉아서 타코야끼를 꺼내먹었다. 먹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건너편에 보이는 창고같은 건물이 죄다 무슨 고급 레스토랑이나 카페인 듯. 웨이터들이 와인을 서빙하는 것이 보였다. 앗, 이건 무슨 기분이람. 꼭 부잣집 식탁을 들여다보며 싸구려 빵조각을 먹는 부랑자가 된 기분? 원래는 운하 가의 창고였던 것이 관광지가 되면서 대부분 식당으로 개조한 것이었다.
또, 바다를 보자는 심산으로 조금 더 걸어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신혼여행의 마지막 밤이니 맥주 한잔 하자고 오타루 비루 No.1 (小樽ビ-ル 小樽倉庫No.1)에 갔다. 아까 운하에서 바라본 창고 카페 중 한 곳이다. 입구는 당연히 운하의 반대쪽이고. 들어가보니 문닫기 한 시간 전인데, 뭐 맥주 한잔 할거니까 괜찮다고 하우스 맥주 2잔을 주문했다. 사실 더 먹으라고 해도 너무 비싸서 못 먹을 것 같았다. 맥주 두 잔 값이 무려 1,700엔.
그런데 맥주를 반쯤 마시기도 전에 사건 발생. 신군이 주머니를 뒤지더니 지갑을 꺼내 샅샅이 살피는 거다. 왜그러냐고 물었더니 호텔 카드키를 잃어버린 것 같단다. 아이고 세상에. 내가 기차놓친거 그만 미안해하라고 이런 사고를 또 쳐주는구나. 더 늦어져서 카운터를 닫기 전에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호텔에 돌아가면서 키를 잃어버렸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카드키 보상하려면 얼마나 들까 고민했는데 다행히 방 안에 두고 나온 것으로 밝혀졌다. 휴우- 이렇게 하루가 마무리되었다.